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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이성
    내 이야기 2016. 2. 21. 13:23

    사랑하는 일은 정말 내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은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사랑은 너무나도 이성적인 일이다. 나는 처음에 저항하고 싶었다. 누가 사랑이 그렇게 이성적인 일이라고 정해 놓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랑에 대해서 논하곤 할 때 사람들은 항상 이성적인 요소를 논했다. 누군가 좋은데 논리적으로 상황이 좋지 못하다 라던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까지 의식해서 말이다. 나도 사랑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다 알고도 그러한 요소들에 저항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상식에 대한 도전은 역시 패배로 끝났다.

    나의 20살은 도전의 역사로 점철된다. 술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산산히 부서진 일. 왜 머리카락은 항상 단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전으로 머리를 초록색으로 만든 일. 패션은 무난해야 된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도전해서 항상 튀어 보이는 색깔의 패션을 추구한 일.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생각은 그 도전들이 충분히 가치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도전들 중에서도 가장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인데 이 역시 얼마 전 수정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성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사랑하는 감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나에게만 이성적이지 않게 느껴진다면 이제 서로의 감정이 빗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완전히 논리적인 사람일 수 없고 어떤 사람도 완전히 감정적인 사람일 수 없다.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의 첫 장에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논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철학을 유지하지 못한 점과 소크라테스를 비교한다. 철학과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철학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일이지만 죽음을 회피하려는 인간이라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은 감정적으로 두려운 상대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록되는 바에 따르면) 태연히 죽음을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가 역사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겐 소크라테스가 되지 못할 것이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나는 감정적으로 충만하고 싶다. 나는 우리의 동물적인 부분을 동경한다. 그렇지만 나는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과 함께 하는 사랑은 본능과 이성이 사람을 이루고 있는 비율만큼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매일 나는 무수한 관찰을 통해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직접 부딪쳐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한다.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어렵겠지만 이것 역시 도전이다. 계속해서 변하는 것이 나의 철학이고 그렇다면 나도 이제 소크라테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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